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두정의 내전 (문단 편집) == 배경 == 284년, 로마 제국의 동방 정제 [[누메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던 중 마차 안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후, 근위대장 디오클레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하고 새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서쪽으로 진군해 285년 3월 서방의 황제였던 [[카리누스]]를 물리치고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지난 50년간 수많은 황제가 비명에 죽었고, 황제 혼자서 외세의 침략과 내란을 막기에는 제국이 지나치게 넓다는 게 분명해졌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자서 제국을 이끄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제국을 분할하여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이들에게 각지의 방위를 맡기기로 했다. 우선 카리누스를 물리친 직후, 친구 '''[[막시미아누스]]'''를 서방의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하여 라인 전선과 아프리카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도나우 전선과 시리아 전선을 사수했다. 이후 286년에 막시미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칭호)|아우구스투스]](정황제)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카라우시우스]]가 브리타니아에서 독립하여 '브리타니아 제국'을 선포하고, 아프리카 속주에 대한 [[베르베르인]]들의 침략이 갈수록 거세진 데다, 도나우 강변의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의 동태도 심상치 않아서 두 명의 황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93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두 명의 부제를 선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지명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지명했다. 이른바 [[사두정치]]의 시작이었다. [[파일:Prima_tetrarchia_Diocletianus.png]] 293년부터 305년까지의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수도를 [[이즈미트|니코메디아]]로 정하고 아나톨리아 반도, 폰투스, 시리아, 이집트 방위를 맡았다. 동방 부제로 지명된 갈레리우스는 수도를 시르미움으로 정하고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를 맡았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는 수도를 [[밀라노|메디울라눔]]으로 정했으며, 이탈리아, 아프리카, 히스파니아를 맡았다. 그리고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수도를 [[트리어(독일)|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으로 정하고,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를 맡았다. 두 정제는 부제들과의 정치적 결연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부제들의 양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또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자기 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를 결혼시켰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역시 갈레리우스와 자기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를 결혼시켰다. 다만 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선임 황제라는 뜻의 '세니오르'(SENIOR)를 칭하며 거의 단독으로 결정하고 다른 황제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조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는 라인 강 전선에서 활개치는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카라우시우스의 반란을 진압해 브리타니아를 로마 제국에 복종시켰으며, 막시미아누스는 아프리카 속주에서 준동하는 베르베르인들을 쳐부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를 쳐부수고 흐트러진 행정을 재정비했으며, 갈레리우스는 도나우 강 전선을 안정시키고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일대를 공략하던 [[나르세스 1세]]의 페르시아군을 대파하고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한 뒤 <니시비스 평화 협약>을 강요하여 [[아르메니아 왕국]]과 [[이베리아 왕국]]이 로마의 봉신이 되는 걸 인정하게 만들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일대를 로마 제국에 할양하도록 했다. 그후 제국의 질서를 개편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큰 성과를 거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11월 20일 세 명의 황제와 함께 로마에서 그동안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로마 시민들이 자신을 친근하게 대하려 하자, 일반 시민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절대적인 권위를 추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에 있는 게 불편해져서, 303년 12월 20일에 로마를 떠났다. 이후 304년 1월 1일 라벤나에서 집정관 취임 의식을 거행한 뒤 도나우 강으로 향한 후 갈레리우스의 대 카르피족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걸린 가벼운 병이 악화되자, 늦여름에 니코메디아로 돌아갔다. 304년 11월 20일 니코메디아 궁전 인근에 열린 서커스 개막식에 참석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후 궁궐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았고, 니코메디아 전역에 그가 이미 죽었으며 갈레리우스가 권력을 온전히 장악할 때까지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305년 3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대중 앞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면서 소문이 거짓이라는 게 확인되었지만, 몸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해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들과 근위대 장교들, 군단 대표자들을 소집한 뒤 유피테르 신전의 조각상 앞에서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선임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발적으로 제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성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카이사르로 지명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뜻밖에도 갈레리우스의 오랜 부하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의 외조카였던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카이사르로 지명했고,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무시당했다. 4세기 경의 기독교 역사가였던 [[락탄티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갈레리우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퇴위했으며, 후임 인선 역시 갈레리우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후임 카이사르로 지명한 선택에 갈레리우스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실제로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황제 퇴위 이래 적어도 영향력은 엄연히 갈레리우스보다 선임 황제로서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였던 콘스탄티우스를 압도했다. 서방 부제가 오랜 부하였고 동방 부제가 생질이었으니..... 다만 콘스탄티누스를 인질로 삼고 여러 전투에서 선봉에 내세워서 콘스탄티누스를 학대했다는 얘기는 기독교도들의 왜곡일 소지가 높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을 때도 늘 선봉에 나섰고 훗날 부제가 되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진 이후에도 로마인들이 보기엔 정신 나갔다 싶을 정도로 전열 맨 선두에 나서서 적병을 격살하길 즐기는 전형적인 맹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을 돌려보내달라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댄 건 사실로서, 이유는 유능한 맹장인 콘스탄티누스가 꽤나 쓸만해서 보내주기 아까워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콘스탄티우스 또한 아들 콘스탄티누스와는 달리 나서기를 삼가는 진중한 스타일이었던지라, 이렇게 시작된 2차 사두정치는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의 주도하에 잘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던 306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지 1년만에 브리타니아의 북부 변경이었던 [[요크| 에보라쿰]]에서 병사하자, 이민족 족장들 및 현장에 있던 장병들이 1년 동안 외적에 맞서 용맹을 떨친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 즉 새로운 서방 정제로 추대했다. 이는 사두정 체제 붕괴의 서막이 되었다.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휘장과 의복을 갖춘 초상화를 받아보고 불속에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군대를 동원하여 서방 정제를 참칭한 콘스탄티누스를 격멸하려 했지만, "이런 일로 내전을 벌이는 건 무익한 짓이다"라는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콘스탄티누스에게 "카이사르로 인정해줄 테니 아우구스투스 직위는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일단 정통성을 인정받는 게 중요했기에 받아들였다. 이후 서방 부제 세베루스가 당연히 정제로 승격하면서 히스파니아 속주들을 받아갔고, 갈레리우스는 그 시점에서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가 된다. 그렇게 콘스탄티누스가 카이사르, 곧 서방 부제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로마에 있었던 전임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격노했다. 20년간 카이사르로서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년 정도 아우구스투스를 맡았던 자의 아들은 카이사르가 되었는데, 20년 세월을 아우구스투스로서 서방 세계를 이끌었던 아버지의 장자인 자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여기에 장군들이 제국을 4개로 분할하고 수도를 별도로 정하여 통치를 행사하느라 졸지에 들러리가 되어버린 [[SPQR|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그리고 로마 시를 지키는 역할만 맡고 있었던 [[프라이토리아니]]의 불만도 매우 컸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막시미아누스 부자와 로마 시민들의 주장으로서, 정작 막시미아누스 자신은 선임 정제, 즉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던 중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로마 시 역시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처럼 속주세를 내게 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민들은 격분했다. 결국 306년 10월 28일,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이 서방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파견한 로마 시장과 몇몇 고위 행정관들을 죽이고 막센티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뒤이어 루카니아에 은거하고 있었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아들의 요청에 응하여 로마로 달려간 뒤 황제의 의복을 입고 원로원으로부터 "두 번째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었다. 이리하여 장장 20년 가까이 이어지는 내전이 발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